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폰티우스 필라투스 (문단 편집) == 역사적 기록 == 로마인임에도 정작 [[성경]] 외에 그의 신원에 대한 로마 쪽의 기록은 없는 수준이며,[* 유대 속주의 총독 정도는 오늘날 한국에 비교하면 군수 정도의 위치이다. 현직에 있을 때에야 로마 중앙정계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을 거고 그가 언급된 행정 문서도 제법 있었겠지만, 후대에 전해질 만한 행적이 없다면 당대의 행정용 기록들이 소실되면서 자연히 잊히는 것이다.] [[성경]] 외의 그에 대한 로마의 기록은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에서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설명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처형당했다" 정도로 짧게 언급하는 정도밖에 없다. 오히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지역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살펴봐야 하는 실정이다. 유대 철학자 필로는 필라투스를 "거칠고 악의가 있으며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필라투스가 부임하고 나서 곧 [[유대인]]들을 적대하였다"고 지적한다. 유대 고대사는 당대의 기록 중에 [[예수]]와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관해 쓴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유대인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 않은데, 필라투스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유혈 진압하는 군사적인 탄압 외에도, [[유대교]] 성전에 로마식 신상(神像)을 달았다가 반발로 철회한다거나, 성전의 자금을 가져다가 로마식 수도관을 건설하는 정책을 세웠다가 유대인들의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서기 26년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후임으로 [[유대]] 지방에 부임했다. 이 시절 유대 지방은 심심하면 폭동을 일으키는 험지라 [[로마 제국]]에서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겼고,[* 예수가 살아있을 때도 [[열심당원|젤롯]]이라 불리는 저항세력이 활동했고, 훗날 예수가 죽은 지 겨우 [[제1차 유대-로마 전쟁|30년 뒤에 로마와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저항이 심한 지역이었다.] 이전 로마 총독들은 번번이 안정적인 통치에 실패했기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는 만만한 인물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때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에 강경책을 쓰자는 [[세야누스]]의 추천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임명받았다고 한다. 당시 로마 총독의 임기는 관례적으로 3년이지만 티베리우스가 이례적으로 장기집권을 맡겨 필라투스는 서기 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를 통치했다.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지론 때문이기도 한데, 신하들을 극히 불신하던 티베리우스는 지방관들을 '파리'에 비유하며 '''"상처 부위에 여러 파리가 와서 빨아먹는 거보다, 처음부터 빨아먹던 파리 한 마리가 계속 빨아먹는 편이 낫다"'''면서 필라투스에게 장기간 통치를 보장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세야누스의 예상대로 강경한 정책을 자주 시행했는데, 우선 부임할 때 카이사레아 지역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를 유대 왕국의 수도이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재배치했고, 더불어 유대의 행정 장관 중 처음으로 유대인이 우상으로 여기며 혐오하던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가 유대인들의 강경한 반발로 다시 철수시킨 일도 있었다. 더불어 치수공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왔는데 이것이 성수 장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불만을 내비쳤다. 유대인들이 필라투스에게 항의하는 집회를 계속 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해산시켰지만 갈수록 먹히지 않았고, 결국 진압은 유혈사태로 비화되지만 일단은 소요를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그즈음 예수가 처형당한다. 그러나 기록을 토대로 판단해볼 때 필라투스를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예수를 처형하는데 주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내용을 들어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깜이 안 되는데?" 라고 여겼다면 기꺼워하지는 않았을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이미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현재 유대교 학자들은 당시 산헤드린 재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경 구절이 산헤드린 공회법정의 재판절차와 권한과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 불일치를 종교권력이 사법절차에 개입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망칠 정도로 부패한 결과라고 본다. 사실 기독교측의 주장을 빼더라도 전근대 시절 그 어떤 나라도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엄정한 절차대로 모든 일이 처리되기는 어려웠다. 진실은 저 너머에. 필라투스가 손을 씻은 것과 유대인들이 적극 처형을 주장한 것이 후대 [[복음서]] 성립 시 [[기독교]]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섞여 왜곡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앞서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인에게 반감을 샀고, 통치시기에도 유대인의 풍속으론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 군기나 장비에 있는 황제의 형상을 가려야 하지만 일부러 대놓고 무시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두가이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성전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는데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 성전자금은 고아나 과부들의 구휼자금으로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착복하고 나서 수로작업에 썼다고 변명했다. 그럼에도 수로작업에 들어갈 공사비가 모자라 다시 세금을 걷었다.[* 이 자체는 로마 입장에서 별 문제가 안 된다. 로마 제국에서 지방관은 중앙에 바치도록 지정된 세금 액수를 맞춰 내는 것은 물론 예하 군단이 있을 경우 그 유지비용을 대야 했고 로마 고위층에 뇌물을 바쳐 승진도 하고 자리도 보전하고 일가도 먹여살려야 했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지방관은 재원 확보를 위해 자체적으로 사업을 하거나 그로도 모자라면 자기 통치지역을 추가로 쥐어짜는 일이 흔했으며, 제국 측에서도 착복이 도를 넘는 수준이거나 반란을 유발해 진압비용이 더 들어가거나 하지 않는 한 굳이 터치하지 않았다.] 이처럼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정직하지도 유화적이지도 않았다. 예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한 학자가 말하길 그에게 다시 예수에 대해서 물어보면, 오히려 누구냐고 반문했을 것이라 한다. 즉 예수 처형은 그에게 단순 업무 처리에 불과했다는 소리다. ~~"여보쇼, 내가 도장 찍은 건이 몇 건인데..."~~]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집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 티라타바라는 마을 근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34년 집정관)|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네로]] 사후 잠시 황제가 되었던 [[비텔리우스]]는 이 사람의 아들이다.]에게 항의한다. 비텔리우스는 필라투스를 10년 동안 있었던 유대 지사에서 해임시키고 [[티베리우스|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유대에서의 폭력사태에 대해 답하도록 로마로 보낸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도착할 때, 티베리우스가 죽는다.[* 티베리우스는 기원후 37년에 죽는다.] [[유대인]]들은 사두가이인, 바리사이인, [[열심당원]] 모두 가리지 않고 필라투스를 증오한 걸로 보인다.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폭동에서도 필라투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무시했고, 유대인들은 이런 간섭에 대해서 반감이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